1919~1945,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입니다.
<aside> 📰 미국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자에서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 라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는 구상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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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회를 설립해서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했습니다.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aside> 💡 대한민국임시정부 역경사
출범 직후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와 군사 활동에 집중하면서 법령과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국을 설치하여 연락망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수립 당시부터 군사 활동을 주요 목표로 정했습니다.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했고,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김구는 청년들을 기반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서 이본창의거와 윤봉길의거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세계 각국의 언론이 윤봉길의 거사를 보도하면서 임시정부의 존재와 활동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의 활약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32년, 일본이 윤봉길 의거의 배후 수색에 나서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급히 상하이로 떠나야 했습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난 후 항저우 · 전장 · 창사 · 광저우 · 류저우 ·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8년여에 걸친 이동 시대를 거쳤습니다.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승인 외교는 전후 처리에 있어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신탁통치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거부했고,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습니다. 승인 문제가 헌법 체계를 갖추고 20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하였던 임시정부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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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정서(서간도)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조직으로 편제되었고 교포자치 기관이었던 경학사에서 발전되었습니다.
1911년 설립된 신흥강습소에서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습니다.
1920년 8월 김동순 · 한우석 등 조선총독부 총감 처단, 일제기관을 폭파했고 1921년 친일단체 보민회를 해체시켰습니다.
북로군정서(북간도)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조직 편제되었습니다.
1919년 10월 대종교와 신민회 주도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통합, ‘대한군정부’로 개편되었습니다.
12월 임시정부는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변경할 것을 조건 승낙했습니다. 이때부터 대한군정서가 공식 명칭으로 지칭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서로군정서와 구분해서 대한군정서를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으로 사용했습니다.
1920년 청산리 대첩 승리로 이끌었고,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 입고 만주로 돌아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재건했습니다.
이후 이 조직은 신민부로 발전했습니다.
**참의부 · 정의부 · 신민부 (3부) 간도참변(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은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흩어진 진영을 정비하기 위해 1922년 8월 북만주 지역에서 대한독립군단이, 남만주 지역에서는 대한통의부가 성립되었습니다.
1924년 5월 일부 세력이 대한통의부를 이탈해 참의부를 조직(서간도), 임시정부 직속을 표방하면서 무장투쟁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대한통의부는 이후 남만주 지역의 세력결집을 계속해 1924년 11월 정의부로 확대 개편했으며, 북간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단과 북로군정서가 통합되어 1925년 3월 신민부를 창립했습니다.
한국광복군 1940년 9월 충칭에서 창설되었습니다.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편성한 궁극적 목적은 미국, 영국, 중국 등과 함께 2차 대전에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하여 일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전승국의 자격으로 한국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전략사무국(OSS)과 공동작전 구상과 인도 · 미얀마전선에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한 것입니다.
한국광복군 성립기념식 (1940.9.17.)
<aside> 🔙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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